(백덕현 에세이) 바이어와의 약속은 생명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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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덕현 에세이) 바이어와의 약속은 생명처럼

 

 

1982년도 내가 대리 시절이었을 때 이야기다. 수주받은 오더는 원부자재를 수배하고 봉제 공장에서 제품을 생산하는 공정을 거친다. 의류 제조업은 자본이 많이 들지 않았기에 어렵지 않게 공장을 운영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봉제 공장은 모든 것이 열악했다. 봉제 공장은 직원들은 토요일 근무는 당연하고, 일요일에도 한 달에 한두 번 쉬는 정도였다.

 

제조 생산공장은 자금이 넉넉지 않아 제품 생산 시작 전에 공임을 미리 받아가 급여를 주는 선급금제도라는 게 있었다. 원칙은 부동산 담보를 잡고 선급금을 주어야 하지만 어려운 공장 상황에서는 담보로 잡을 만한 자산이 없었다. 그래서 선적일이 급한 오더는 사장 개인 약속어음을 공증받아 담보로 하여 선급금을 주고, 제품 생산 후 출하를 하면 상환하는 식으로 운용하였다.

 

기억하기로는 추석쯤이었다. 추석 후 바로 생산 출하를 하여 선적해야만 하는 오더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이다. 공장은 선급금으로 추석 자금을 막을 수 있었지만, 추석이 지나고 직원들의 복귀가 느려 생산이 자꾸 지연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급기야 공장 사장이 행방불명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나로서는 생산하던 제품을 생산 완료하고 출하하는 게 최우선의 과제였다. 공장장과 협의하고 다시 공임을 지급하고 생산을 독려하였다. 바이어와의 납기 문제를 조정해가며 언제까지 선적하겠다고 양해를 구하고서, 공장장과 내가 제조공장 직원들을 달래가며 생산을 마무리하여 갔다.

 

제품 생산 완료 후, 출하하는 날 공장 직원들이 일부 급여를 받지 못했다며 제품 출하를 거부하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직원 한 사람씩 면담해가며 개인당 받지 못한 임금을 다시 정산해주며 제품을 출하했다.

 

마무리하고 회사에 돌아와 정산해보니 지급한 공임이 모두 계약금액의 3배가 되는 것이었다. 추가 공임을 변상하는 방법은 공증해 놓은 개인 약속어음을 법원에 집행 신청하여 사장 개인의 자산을 찾아 공매하는 방법뿐이었다.

 

나는 공장 사장 집을 찾아갔다. 이미 다른 집달관들이 들어와 집안의 모든 가구에 소위 말하는 딱지를 붙여 놓은 상태였다. 사장과 부인을 만났으나 서로 할 말이 없었다.

 

사장이 백 대리가 눈으로 보았으니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것이었다. 한창을 서성이다가 사무실로 돌아왔다. 나는 사고 보고서를 작성하여 꾸지람을 듣고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 선적한 제품에 대해 바이어로부터 끝까지 약속을 지켜 주어 고맙다는 이야기를 텔렉스로 받았다.

 

그 일본 거래선은 그 후 나의 중요한 거래선이 되었다.

 

 

 백덕현은 1951년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나서 연세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1977년 코오롱에 입사하여 잭 니클라우스 팀장 코오롱스포츠 사업부 이사 등을 역임하며 생산과 유통 분야 요직을 두루 거쳤다. 2001년 당시 상무 직급으로 FnC코오롱 대표이사 자리에 올랐으며, 2004FnC코오롱 중국법인장을 맡아 중국 사업을 진두지휘했다. 2009년 코오롱인더스트리 FnC부문 대표이사로 복귀하여 코오롱그룹의 패션사업 부문을 이끌었다. 18대 한국의류학회 부회장을 역임했고 2016년에 제3대 한국패션산업연구원 원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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