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덕현에세이) 잔이 비었다고 아무것이나 채우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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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덕현에세이) 잔이 비었다고 아무것이나 채우지 마라

 


2002년 한일 월드컵 시작 1~2년 전부터 월드컵 후원자 의뢰를 받았다. 과거 코오롱에서의 풍부한 경험과 국가 스포츠 기여도를 고려한 문화관광부와 대한체육회에서 의뢰가 왔다. 여러 방면으로 검토하였으나 특이한 것이 없고, 절차와 진행이 복잡하여 사양하였다. 그 후 월드컵 스폰서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룹에서 1980년대 말에 분리해나간 코오롱고속에서 월드컵 스폰서를 계약하고 월드컵 휘장을 사용한 티셔츠 판매권을 얻어 티셔츠를 생산 판매하고 있었다. 코오롱고속 사장은 과거 스폰서십 사업에 경험이 있었다고 한다. 수많은 제품을 생산하였으나 계획대로 판매가 되지 않았다. 생산은 해 놓고 판매가 되지 않으니 생산공장에서 대금 지급을 요구해도 지급 능력이 없으니 대금 지급을 차일피일 미루면서 한계에 달하게 되었다.

 

어느 날인가 코오롱고속 사장이 우리 회사에 와서 미팅하자고 하여 만났다. 자기가 생산한 티셔츠를 FnC 소속 전국 매장에서 판매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룹의 몇몇 사람과 상의하여 동의를 받았다는 것이다. 나만 동의하면 당장 내일부터 판매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매장에서 판매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 거절하였다. 즉 매장에서 판매하는 제품이 대부분 15만원 이상인데 한 장에 2만원짜리 티셔츠를 어느 매장에서 열심히 팔 것인가? 그리고 우리 회사 매장과 콘셉트가 맞지 않는다고 설명을 하였다. 물론 한두 장은 팔리겠으나 한두 장 팔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권유했다.

 

그 후로도 몇 번을 찾아와서 부탁했으나 동의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자 그룹 내부에서 나에 대한 불만이 여기저기서 나오기 시작하였다. 도와줄 수 있는 데 안 도와준다고 말이다. 특히 그룹 내에 코오롱고속 사장과 입사 동기들 사이에서 불만이 많았다.

 

몇 개월이 지나자 코오롱고속은 자금난을 이기지 못하고 회사가 부도 처리가 된다. 코오롱고속이 부도가 나자 생산 업체 사람들이 과천 코오롱으로 와서 제품 생산에 대한 대금 지급을 요구하며 농성을 하기 시작했다. 과천 사무실과 과천 정부청사 운동장으로 모여 농성하였다.

 

그러나 이미 1980년대 말 그룹 분리로 전혀 관계가 없다는 내용을 이해하는 데까지 약 한 달간 계속해서 농성하였다. 만약 당시 내가 매장에서 셔츠를 한 장이라도 팔게 했다면, 생산대금과 재고제품에 대한 금액 몇백억원을 고스란히 부담해야 했을 것이다. 생산한 사람들이 대그룹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명분으로 우리 회사에 막무가내로 요구를 하면, 사회적 분위기상 어쩔 수 없이 해결해야만 했을 것이다.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원칙에 따른 결정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

 

(사진은 2002년 붉은악마 티셔츠 로고)

 

 

 백덕현은 1951년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나서 연세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1977년 코오롱에 입사하여 잭 니클라우스 팀장 코오롱스포츠 사업부 이사 등을 역임하며 생산과 유통 분야 요직을 두루 거쳤다. 2001년 당시 상무 직급으로 FnC코오롱 대표이사 자리에 올랐으며, 2004FnC코오롱 중국법인장을 맡아 중국 사업을 진두지휘했다. 2009년 코오롱인더스트리 FnC부문 대표이사로 복귀하여 코오롱그룹의 패션사업 부문을 이끌었다. 18대 한국의류학회 부회장을 역임했고 2016년에 제3대 한국패션산업연구원 원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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