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덕현 에세이) 리비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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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덕현 에세이) 리비아에서

baiksong51 0 2020.02.17

걸림돌도 때에 따라 길이 된다

 

1982년부터 아프리카 북부 리비아에 중동사람들의 셔츠를 수출하게 되었다. 프랑크푸르트 지점과 함께한 공동전략이었다. 첫해 약 20만 불 어치를 수출하고 여름에 리비아 트리폴리로 출장을 갔다. 그곳 거래선 직원들과 약속 잡기가 여의치 않아서 적게는 한 달 보통 두 달 정도 기간이 필요하였다.

 

매일 아침 거래선을 방문하여 담당자를 찾으면 없다고 한다. 언제 돌아오냐고 수위한테 물으면 늘 인샬라(신만이 안다)”라고 대답한다. 보통 하루에 3~4번 방문을 하는데, 어쩌다 수위가 기분 좋을 때 들어가게 되면 바로 담당자에게 안내되어 상담하곤 했다.

 

나는 매년 한 달간 리비아로 출장 가서 상담하고 오더를 수주하는 형태로 업무를 진행하였다. 매년 50~60만 불 어치를 수주하고 선적하였다. 당시 리비아는 외화 보유가 적어 신용장(L/C) 오픈을 순조롭게 진행할 수 없었다. 완제품을 수출하던 중 거래선에 제안하였다.

 

 

리비아에 봉제 공장을 세워 자체 생산을 하면 좋겠다. 모든 원부자재는 코오롱에서 수배하여 공급하겠다

 

이러한 제안이 받아들여져 1985년에 아라비안 와이셔츠 10만장을 생산할 수 있는 기계와 원부자재 전량을 납품하기로 계약하였다. 기계와 원부자재를 선적하고 봉제 공장을 설치할 수 있는 기술자를 파견하여 봉제 생산 설비 설치에서 제품 생산까지 봉제 생산 기술을 완벽하게 인계해 주었다.

 

이를 계기로 리비아측 거래선에서는 코오롱을 인정했다. 호사다마라 했던가? 1985년에는 청바지 10만장 생산 물량의 원부자재를 수주하여 생산하였으나, 미국과 리비아 간의 전쟁으로 약 600만 불의 신용장이 묶이는 바람에 약 10개월 동안 애간장을 태우기도 했다.

 

1년이 지난 1986년에야 신용장이 오픈되어 선적했다. 전쟁 때문에 수출대금 회수에 어려움이 있었으나, 한 푼도 차질없이 수출대금 전액을 받을 수 있었다. 처음으로 시도된 봉제 플랜트 수출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이 공적이 인정되어 1986년도 수출의 날에 상공부 장관표창을 받았다. 이런 경험이 훗날 인도네시아에도 봉제 공장을 설립하여 생산하면서 미국과 유럽에 할당제로 묶인 지역에 우회 수출을 할 수 있었다.

 

 

백덕현은 1951년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나서 연세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1977년 코오롱에 입사하여 잭 니클라우스 팀장 코오롱스포츠 사업부 이사 등을 역임하며 생산과 유통 분야 요직을 두루 거쳤다. 2001년 당시 상무 직급으로 FnC코오롱 대표이사 자리에 올랐으며, 2004FnC코오롱 중국법인장을 맡아 중국 사업을 진두지휘했다. 2009년 코오롱인더스트리 FnC부문 대표이사로 복귀하여 코오롱그룹의 패션사업 부문을 이끌었다. 18대 한국의류학회 부회장을 역임했고 2016년에 제3대 한국패션산업연구원 원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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