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HChoice의 Market Story 10 -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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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HChoice의 Market Story 10 -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BHChoice 2 2019.05.09

BHChoiceMarket Story 10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지지리도 깡촌인 두메산골에서 자랐다. 집 앞에 보이는 산이 1,151m, 뒷산이 1,279m이고, 사는 동네가 군청소재지일지라도 해발 500m가 넘는 곳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아니면 5학년쯤이니까 열 살 남짓할 무렵에 아버지를 따라 전주라는 대도시를 나갈 일이 있었다. 아스팔트 도로가 시원시원하고, 도로 양쪽으로는 즐비하게 콘크리트 건물들이 줄지어 선 모습이 참으로 생경스러웠다. 대개는 5층 정도의 건물들이었지만 그 틈새로 간간이 20층쯤 되어 보이는 건물의 위용은 책에서만 보던 고층빌딩, 마천루였던 것이다.

다시 버스를 타고 전주에서 익산(당시는 이리시)쪽으로 향했다. 몇 해 전 이리역 폭발사고로 가수 하춘화가 크게 다치고 무명 사회자인 이주일이 구해줬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던 도시, 이리시로 가는 길에 끝없이 펼쳐진 김제, 만경평야가 한 눈에 들어 왔다. 순간 충격에 사로 잡혔다. ‘세상에 어떻게 산이 없는 거지?, 어쩌면 야트막한 동산조차 없을 수 있단 말이야?’ 10여 년이라는 내 인생 전체를 통틀어서 이런 광경은 본 적이 없었다. ‘이 없는 자연 풍경. 그리고 지평선’.

그때까지 나에게 세상은 내가 나고 자란 산골이 전부였다. 아무리 책에서 보고, 뉴스를 접한들 그건 그저 다른 세상의 일일 뿐 나하고는 무관했다. 그랬던 저 머나먼 세상의 일들이 눈앞에 직접 펼쳐진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학사장교로 군에 입대했다. 꼬박 41개월 군복을 입고 나서야 전역증이 손에 쥐어졌다. 무역학을 전공했으니 무역하는 회사를 지원해야만 했다. 몇몇 군데 내로라하는 회사에 지원서를 넣었다. 코오롱그룹 공채에서도 상사를 지원했다. 막상 영어에 자신이 없어 내수 사업부를 지원했더니 패션부문과 스포츠 부문에서 선택하라고 한다. 나는 지금도 멋을 부릴 줄 모른다. 그때까지 나는 패션의 는 커녕, ‘조차도 접해 본 적이 없었다. 패션은 그저 먼 나라 사람들의 일이었고 패션이라는 용어는 그들만의 용어였다. 그러다보니 선택할 수 있는 분야는 스포츠 부문뿐이다. 신규 사업부서인 캐주얼사업부로 인사 명령이 떨어졌다. 캐주얼 슈즈를 포함하는 피혁제품을 취급하는 디망쉬라는 브랜드를 운영하는 사업부란다. 나중에 인지한 것이지만 스포츠사업부문에 캐주얼잡화 브랜드 비즈니스는 뭔가 어색하고 어울리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입사 후 한 달 정도 지난 8월말 경에 사수인 윤 모 대리가 새로운 업무를 하달한다. 내년도 우리 부서 사업계획과 예산을 짜보란다. 사업에 대한 개념도 모를 뿐만 아니라 회사 분위기는 고사하고 부서 분위기도 채 파악하지 못했는데 이제 갓 입사한 신입사원에게 부서 사업계획이라니 황당해서 말도 안 나왔다. 아니 어차피 신입사원이라 항의도 할 수 없었지만, 꾸역꾸역 여기 저기 물어봤으나 시원한 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우리 부서의 사업은 신규였고, 스포츠사업부 내에서도 이질적인 마켓을 대상으로 하는 브랜드였기 때문에 별 도움이 안 된 것이다. 당시 예산을 짜려면 PC가 개인 상용화된 때가 아니라서 커다란 전지에 칸을 그리고, 전자계산기 하나를 가지고 회사 근처 여관방을 빌려 며칠 날밤을 새워가면서 작업을 하는 게 관례였다. 다 해놓고도 검산을 해서 맞지 않으면 다시 처음부터 일일이 다시 수정하고 작성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개인별로 PC가 분배되고 ‘Lotus123’라는 프로그램을 활용하니 세상에 이처럼 쉬운 일이 세상에 없다 싶었다.

 

신입사원의 신분으로 당해년도 사업실적을 분석하고, 차년도 사업계획을 잡아 예산을 편성하는 일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일을 하는 내내 불만으로 가득찬 마음과 투덜거림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럴 수가, 그 일을 마쳤을 때 일을 끝난 후의 희열은 오히려 별 게 아니었다. 스스로가 너무나 많이 달라져 있었던 것이다. 같이 입사한 다른 부서의 동기들과 단 3~4개월 만에 레벨의 차이가 확연하게 생긴 것이다.

 

홍상수 감독, 정재영, 김민희 주연의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사람들은 누구나가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한다. 자기중심적 사고란 자기가 보고, 배우고, 겪었던 일에서 관념이 생기고, 그 관념이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 관점과 가치관이 세상의 진실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업계의 관계자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다들 그들만이 가지는 패션시장과 브랜드 운영에 대한 주관과 가치관이 있다. 그들의 이야기에서 때로는 공감도 하고, 때로는 부정도 하게 된다. 온라인 시장을 바라보는 시각도 그렇고, 생산 소싱도 그랬으며, 나아가 경영에 있어서도 그랬다. 그때의 관점으로는 정답이었고, 맞는 말일 수 있었으나 지금은 틀린 세상이 됐다.

 

지금 내가 아는 세상이 세상의 전부일거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내가 지평선을 모르고 살아왔던 어린 시절, 패션의 자도 몰라 패션 비즈니스를 회피했던 사회 초년 시절, 가혹한 선배라고 푸념하던 신입사원 시절. 그때 정답이라고 생각했던 일들,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는 틀렸다는 것이다.

 

어차피 우리의 삶 자체가 그렇고, 우리의 비즈니스도 그런 것이다. 그 당시 지금을 예상했던 사람들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불행하게도 그런 사람들은 주류가 될 수 없었고, 마이너리티였다. 아니 패션업계의 마이너리티로 남아 지금까지 이어질 수만 있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불행스럽게도 대부분의 그런 선각자들은 업계에서 퇴출되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 패션업계가 힘들어진 것은 아닐까?

 

“Right Now, Wrong Then”


(사진은 영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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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홍순호 2019.05.10 01:58
어렸을 적 그대의 아련한 추억을 보고 있노라니 마치 성인 동화를 읽는 듯하네요. 덩달아 나도 잠시나마 옛날 추억에 빠질 수 있어 고맙구랴.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거의 절대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얘기라고 봅니다. 갑자기 이 영화가 보고 싶어집니다.
내 기억으로는 유신 시절 신문이나 방송에서 보면 늘 군관민으로 표현이 됐었는데, 지금은 명백히 민관군으로 바뀌었더군요.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BHChoice 2019.05.10 08:51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고,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는 일이 어디 한둘이겠습니까만 맞다고 우겨대는 일 자체가 더 어리석은 것 같아요..